사라진마을 –

생긴지 700년이 넘은 마을이었던 이곳은 한국전쟁 전인 1949년 1월 4일과 5일 이틀 동안 이곳 주민들이 학살당해 마을은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곳을 우연히 방문한 저는 이 유적을 산책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기록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 4429

곤을동 4.3 유적지는 제주항과 굉장히 가깝습니다 제주 관광지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곳으로 화북공단에서 바다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차에 흠집이 있어서 수리를 맡기기 위해 화북공단의 한 업체에 차를 맡기고 나서 딱히 갈 곳이 없어서 정처없이 걸어서 이 동네를 산책했습니다.

순댓국 한 그릇 먹고 화북동 골목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점점 바다 쪽으로 향하게 됐어요^^

이렇게 제주항이 보이는 고요한 해변에 도착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아주 조용한 동네였어요.화북공단은 제주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거리입니다.

그런 곳에서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이 나타나서 기뻤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표석을 봤는데 이걸 보기 전까지는 여기가 곤을동이었다는 것도 몰랐어요.

내용 요약

곤을동이라는 이름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다.

이곳은 화북천 지류를 중심으로 밧곤을, 중곤을, 안곤으로 나누는데 고려 충렬왕 26년 별도현에 속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43여가구가 있던 이 지역 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어업도 겸해 평화롭게 살다가 43사건 중이던 1949년 1월 4일 군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당해 온 마을이 전소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글을읽고아,여기에4,3사건으로피해를입은마을이있었구나.라고생각할수있었지만여기에는표석만있을뿐다른게없었어요.

나는 바닷가를 따라 더 걸어 보았습니다.

방파제 때문에 파도도 별로 없는 잔잔한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산책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건울동 유적지를 만났어요.

이 강을 건너자마자 사라진 마을 곤을동 유적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원래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곳으로 이렇게 길도 만들어져 있어서 쉽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집은 어디를 가나 이끼 낀 돌담만이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사람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느 43사건 희생자의 평화로운 주거터

이 돌담은 당시의 비극을 기억할지 이 사건은 625전쟁 발발 전 남북한 정치 이념적 대립상황이 빚은 비극입니다.

남로당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꼭 1년 전인 1949년 6월 24일에 당원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북로당과 합당해 조선노동당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남로당은 현재 북한 집권 세력인 조선노동당의 전신이자 남쪽을 담당한 조직이라고 보면 되죠.

공산주의 국가의 역사를 보면 그렇듯이 이들은 농민 같은 순진한 사람들을 부추겨 변혁을 일으킨 뒤 국가의 모든 부와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원래 묵묵히 노동하며 사는 서민들은 순진합니다.

사기당하는 것도 제일 쉬워요.

더 나아가 부자를 죽이고, 빼앗고,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라는 컨셉에 사회적 약자,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속하는 서민은 현혹되기 쉽습니다.

사실 공산주의는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가장 극단적으로 독재화된 정부가 되고, 극소수의 풍요로운 사회가 된데다 효율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로 이미 30여년 전에 종주국인 소련의 해체와 함께 실패했다고 결론지어졌고, 현재는 북한 이외의 공산주의 국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이 세계에서 망한 유행이지만, 그 당시는 매우 매혹적인 컨셉트였습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일당 독재당의 이름이 공산당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입니다.

아시다시피 빈부격차도 굉장히 심해요.

나는 제주도민이 되면서 43사건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 이를 알고는 무척 화가 나고 힘들었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이 사건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만큼 이 사건은 단순히 누가 잘못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매우 복잡한 남북 이념 대립과 (서로를 없애기 위한) 적대적 활동 속에서 무고한 순박한 농민들을 앞세워 전복을 꾀하던 김일성 세력(노동당)과 이를 진압하려는 남한 정부의 무자비한 소탕 작전에 따른 것으로 625전쟁과 다를 바 없는 민족의 비극이다.

‘왜 선량한 백성들이 보호받지 못했는가’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질문들은 한국전쟁에도 해당되고 다 떠올리기 힘든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부분입니다.

저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 남로당의 선동으로 미군과 한국정부에 반감이 깊었던 당시 도민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고(제주도 등 각지에서 노동당의 공작에 의해 나타난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존립할 수 없으며 북한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도 매우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43사건’하면 자동적으로 ‘이승만 개객기’라는 말이 나오던 저였는데, 백과사전을 보고 사건을 살펴보면 그렇게 흑백논리로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한국이 통일이 되든 북한이 통일이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민주주의 없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서 태어난 것을 고마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아프고 결론은 내지 못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 4.3 사건과 그 흔적인 곤을동 4.3 유적지…

이걸보고생각하면,다시는이런비극적인일과그런상황이없기를바라는마음. 그것뿐이에요.

곤을동 4.5 유적지에서 공부하며 많은 고민을 했던 저는 걷던 길을 조금 더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걷는 이 길은 제주 올레길 18코스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금 더 가면 이렇게 ‘에기업은 돌’과 ‘해안절경’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저는 해안절경도를 가보았어요.

이렇게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비가 온 뒤라 내리막길 고무매트가 미끄러져서 넘어졌어요.길도 안보고 사진만 찍으면서 걷다보니 생겼어요.. 당연했어요..ㅎㅎ 그래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쓰러지니까 핸드폰과 손에만 흙이 묻어 버렸어요.

여기는 분명히 초소가 있던 곳일 거예요

멀리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가 보이고 제가 목포를 왔다갔다 할 때 자주 탔던 퀸메리호도 보입니다.

그런데 해안절경에 가는 도중, 갑자기 차를 수리했다는 전화가 와서 되돌아왔어요.

위의 산책로와 바다 쪽 산책로와 연결되는 길이 있으면 좋겠는데, 위와 같이 그런 길이 없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길 없음이라고 표시된 이곳에 작은 길이 생기면 곤을동 4.3유적을 윗길에서 본 뒤 아랫길로 돌아가면 유적을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도 절약되겠지요. 요즘 사람들은 어깃장을 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쪽이 해안쪽에 있는 길입니다.

당시의 마을터를 아래에서 위로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돌담

슬픔에 싸인 채 희생자의 혼이 깃든 곤을동 유적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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